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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때때로 장수풍뎅이

이 글의 일본어 원문은 스타일&아이디어에 2024년 2월 3일 게재되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시미즈 차토리: 여행과 창작 활동


‘현실을 살아가는 시미즈 차토리’인 나는 매일 온갖 일에 오감을 집중하고 그것을 즐긴다. 식사 중에는 미각 세포에 의식을 집중하여 요리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을지, 어떤 육수와 조미료가 쓰였을지 상상한다. 이동할 때는 바뀌어 가는 풍경을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공기를 피부로 느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표현 환경을 정기적으로 바꿈으로써 건설적인 비판과 창의적인 자극을 받을 기회를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작곡가를 꿈꾸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형식주의적인 예술로서 ‘틀’에 끼워 맞출 필요가 있는 클래식 음악과 거기서 직접 파생되는 음악 양식에 적잖은 따분함을 느끼고 있었고, 게다가 작곡과에서 작곡을 배운다는 것은 너무나 관습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일종의 도박이었지만 쿠니타치 음악대학에서 컴퓨터 음악을 전공하기로 했다. 대학에서는 이마이 신타로 씨 밑에서 라이브 일렉트로닉스와 음향 생성 등을 배우는 한편, 기악 작곡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카와시마 모토하루 씨에게 부탁하여 작곡 레슨도 받았다. 그 무렵 작곡한 작품으로는 「시카쿠」 (2013)와 「fiddle」 (2014)이 있다.  


대학 졸업 후, 그저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뜨거운 모험심에, 장학금을 받게 된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으로 사운드 아트를 공부했다. 그러나 미국에 간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장학금을 미국의 바가지 같은 병원비에 쏟아붓는 처지가 되었고, 그 때문에 아파트 월세를 낼 수 없게 되어 대학원 내 시설인 컴퓨터 음악 센터에 침낭을 들고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학칙상으로는 안 되었지만, 시효가 지난 것으로). 건물은 24시간 출입이 가능했고, 시각예술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이 각자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쉴 새 없이 창작에 매진하고 있었다(라기보다 그들도 거기 눌러살고 있었다). 6층 건물 옥상에서 안뜰로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던져버리는 즉흥 행위 예술이나 흙을 먹는 퍼포먼스 등, ‘상식’이라는 이름의 안전벨트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형식주의적 예술과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한 기법과 발상법을 접할 수 있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수료한 후 미국의 여러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전전하거나 미쓰비시 재단의 펠로우로 피츠버그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하면서, 발성 없는 성악곡 「킹교 옵세션」 (2017) 등 스토리성이 강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받아들여져 버리는’, 건설적인 비판을 받을 기회가 적은 환경에 다소 불안을 느꼈던 것이었을까. 전통과 이론을 더 중시하고 현대음악의 본고장이라 불리우곤 하는 유럽을 20대가 지나기 전에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커져, 27세 때 독일 드레스덴 음악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해 마크 안드레와 슈테판 프린스 두 분 밑에서 작곡을 배우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작곡 과정에서부터 이성(logos)이 중시되었고, 늘 작품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았다. 어느 쪽이냐 하자면 감각적으로 음악을 만들고 거기서 스며 나오는 개성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많았던 나에게는 신선하고 고마운 경험이었다. 수료 후에도 독일에 머물며 「넨네코 판츠」 (2021)나 「에비 레볼루션」 (2022) 등 안무나 시각적 요소가 필수적인 음악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에비 레볼루션」 (2022): 소피아 고이딩거코흐(바이올린)와 바바라 리카보나(첼로)

2023년 10월에는 아시아 문화 협회(Asian Cultural Council)의 장학생으로 대만 타이베이로 거점을 옮겨, 주로 자유즉흥을 하는 음악가들이나 무용가들과 협업을 하고 있다. 완전한 나체로 1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빙글빙글 계속 도는 중년 남성 무용가와의 협업이나, 중국 생황을 팬플루트처럼 부는 즉흥 연주회를 비롯하여, 독일에서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이성 중심의 표현 환경과는 결이 다른, 감각적 표현 영역에 몸담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대만에서 만난 표현자들은 학계에서 ‘예술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정말로 마음에 쿵 하고 와닿는 음악을 토해내고 있었다. 대만의 동료들과 감각적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는 이 상황은, 지금까지 중 가장 편안하고 즐거우며, 미국에서의 경험과는 또 다른 의미로 ‘안전벨트를 푼’ 창작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렇게 돌이켜보면 나는 시계추처럼, 몇 년을 주기로 ‘현실을 살아가는 시미즈 차토리’를 정반대의 표현 환경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래 그림은 지금까지 거점을 두었던 나라에서 내가 깊이 몸담았던 표현 환경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독일 음악계 전체가 이론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대만 음악계 전체가 감성에 기반한 창작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각 나라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커뮤니티의 지향성을 단순화해서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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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환경의 변화 (2010-2024)

현대음악은 틀림없이 유럽에서 기원한 음악의 흐름을 이어받은 표현이다. 나 역시 서양예술음악을 배우고 그 창작 수법에 의존하며 확실히 그 혜택을 받으면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지만, 세계를 둘러보면 서양예술음악적 수법만이 현대음악에서의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도 ‘서양’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음악 문화에 물들고 휩쓸리며, 청각예술이나 시각예술 같은 분류의 장벽을 넘어 나 자신과 깊이 관련된 음악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나가고 싶다.

작곡가로서의 시미즈 차토리 (1): ‘시간’의 해방

여기까지는 ‘현실을 살아가는 시미즈 차토리’가 어디서 어떤 영향을 받으며 작곡을 해왔는지를, 굳이 말하자면 내 자신의 일로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논해왔는데, 여기서부터는 ‘작곡가로서의 시미즈 차토리’인 내가 의식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기법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그중 하나가 음악의 ‘흐름’을 해방하는 것이다.  


음악은 시간예술이다. 클래식 음악에는 기본적으로 박자 기호와 템포 지정이 있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메트로놈적 시간성을 새긴다. 한편, 일본의 궁중 음악인 가가쿠(雅楽)처럼 박의 신축률이 연주자에게 맡겨진 시간성을 가진 음악도 존재한다. 이런 모호한 박의 간격을 서양의 오선보에 기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쿠니타치 음악대학 재학 시절 덴마크 출신 유학생의 강력한 권유로 쇼(笙)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가가쿠가 자랑하는 시간성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큰 자산이 되고 있다.

 

메트로놈 기반의 시간성은 작곡가에게 편리하다. 아주 세밀한 리듬 정보를 기보해서 연주자에게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고, 오케스트라 같은 큰 편성으로 연주되는 음악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박자를 세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모든 음악에 이성에 기반한 박절을 적용해도 괜찮은 것일까. 음악의 자유로운 호흡을 멈춰 질식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것은 내 피아노와 쇼의 연주 경험에서 나온 생각이지만, 실제 연주는 작곡가가 머릿속으로 상정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소리의 잔향 시간 하나만 놓고 보아도 공간의 넓이나 형태, 관객 수나 옷차림 등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작곡가 본인이 직접 연주하지 않는 이상, 악보에 적힌 음악을 연주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연주자이며, 그 공간의 특질을 느끼고 연주에 반영할 수 있는 것도 연주자다. 나는 그러한 연주자가, 기보된 메트로놈적 시간성에 꽁꽁 묶여 있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가능한 한 연주자가 유연한 시간성 안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신경 써 오고 있다.

  

음악과 서예 퍼포먼스 단체 ‘오토토 코토바노 아이다(音と言葉の間: 소리와 말 사이)’로부터 작품을 위촉받아 작곡한 「셀프 포트레이트」 (2022)는 앞서 언급한 기법이 알기 쉽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피아노와 서예를 위한 이 작품에서는 박자 기호를 쓰지 않고, 피아노의 페달링에도 유연성을 부여한 기보법을 사용함으로써 피아니스트와 서예가의 판단으로 그 공연장에 가장 적합한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피아노 소리의 움직임은 거의 꾸밈음에 가까운 ‘부름’과, 그 완결을 나타내는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피아니스트는 그 완결음인 본 음표나 화음의 잔향 길이를 그날 그 공간에 맞게 만들어낼 수 있다. 피아노 악보에 기보된 쉼표, 혹은 음표 길이 내에 붙은 페르마타는 리듬 단위로서가 아니라 피아노 소리가 감쇠하는 잔향, 붓에서 떨어지는 먹물 소리, 붓이 화선지를 스치는 소리 등 작품의 다양한 소리가 뒤얽히는 시간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공연 때, 소리와 시간의 소용돌이의 최적의 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무대 위에서 연주를 맡은 연주자들이다.

제목 그대로 「셀프 포트레이트」는 나 자신의 자화상이다. 서예가에게는 ‘원숭이’ (猿)라는 글자를 내 체형을 닮게, 호리호리하고 길쭉하게, 오른쪽 위의 ‘𠮷’(츠치요시)부터 써달라고 부탁했다. 참고로 ‘𠮷’에는 ‘도덕적으로 뛰어나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타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구석이 있다. 인터넷을 보면 ‘정의’를 내세우며 타인을 비난하는 욕설이 난무하고, 현실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파벌을 만들어, 큰 틀에서는 결국 무익한 대립을 반복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대립을 두려워하는 것도, 필요에 따라 대상을 비판하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상상력 없이 독선적인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둡고 비관적인 기분이 들었고, 그런 사람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인해, 나 자신 또한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우위에 두고 나와 타인을 구분하며, ‘독선적인 정의를 내세우는 타인’을 멸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서 또 새로운 루프가 생겨버린다. 그 깨달음으로부터 보이게 된 풍경이 ‘보이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구분 짓고, 내 안에서 또 새로운 ‘혐오’가 싹튼다. 주로 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철학을 통해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차이가 논의되어 왔는데, 인간에게는 있고 동물에게는 없다고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상상력 있는 도덕성’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상상력 있는 도덕성’을 지녔다고 맹신하고 있는 원숭이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원숭이에게 실례일까.  

작곡가로서의 시미즈 차토리 (2): ‘공간’의 해방

내가 음악 작품에서 사용하는 핵심 기법의 두 번째는 감상자의 ‘체험 환경’을 백지 상태에서부터 디자인하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나 현대음악이 상연되는 일반적인 연주회는 슈박스형이나 빈야드형 홀에서 열리며, 무대 위 연주자와 객석에 앉은 관객 대부분이 마주 보고 앉는 경우가 많다. 이 전제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깔고 가는 것은 창작에 있어 상당한 제약이며 자유로운 발상을 가로막는다.  

쿠니타치 음악대학 졸업 작품으로 작곡한 「시카쿠」는 ‘四角 (사각)’과 ‘死角 (사각지대)’의 개념을 기반으로 물리공간적 상식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자 한 작품이다. 중앙에 프리페어드 피아노가 설치되고, 그것을 둘러싸듯 타악기 2명, 관악기 3명, 그리고 현악기 1명으로 이루어진 네 개의 악기군이 사각형의 무대 위에 배치된다. 각 악기군은 향하고 있는 방향이 제각각이어서, 각 악기군마다 설치된 아날로그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지휘자의 실시간 영상에 맞춰 연주한다. 감상자는 네 개의 악기군을 둘러싸는 형태로 설치된 객석에서 음악을 관람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감상자가 앉는 위치에 따라 당연히 소리의 ‘사각지대’가 생기는데, 그 ‘사각지대’가 있는 각 면이 각각 음악 작품 「시카쿠」로서 성립한다. 요컨대 공간의 어느 위치에서 체험하느냐에 따라 들리는 소리가 다른 작품이다. 

「시카쿠」(2013) 무대도

이 작품의 작곡을 시작하기 전 며칠간,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으며 ‘무엇인가’를 만나러 간다. 왜 만나러 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엄청난 필요성을 느끼며 만나러 간다. 그 ‘무엇인가’는 어둠 속에 있어서 손으로 만지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매일 밤 그 ‘무엇인가’의 크기나 형태, 촉감이 다르다. 하지만 그것이 동일한 ‘무엇인가’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무엇인가’와 닿으면 꿈속의 나는 안심이 되는지, 기분 좋게 스르륵 잠에서 깨어난다. 아마 인도의 우화인 ‘장님과 코끼리’를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돌고 돌아 꿈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시카쿠」는 그 신비로운 체험을 바탕으로 작곡한 작품이다.

또 다른 예로, 빛을 내는 소프라노 색소폰과 설치 작품을 위한 「넨네코 판츠」를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색소포니스트 사카고에 유이 씨의 위촉으로 쓴 작품으로, 2021년 봄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호텔 그라팔가의 402호실을 통째로 빌려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이 작품은 뮤직비디오, 즉 영상으로서 완결되어 있었다. 작곡 후 관객 앞에서 상연해야 한다는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유튜브를 통해 현대음악으로서는 그다지 보편화되지 않은 ‘체험 환경’으로 음악 작품을 감상자에게 제공하려는 시도를 했다(연주 기록 영상의 스트리밍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라이브 연주라는 ‘체험 환경’이 먼저 있는 것이고, 유튜브 영상 자체를 ‘체험 환경’으로 상정해서 작곡된 작품은 내가 아는 한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뮤직비디오는 1인칭 시점으로 촬영되었으며, 시점의 주인공이 탄 엘리베이터가 지하 4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호텔의 짧은 복도를 지나 402호실까지 걸어가, 문의 리더 단말기에 카드키를 대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간다. 방 안에서는 수수께끼의 여성이 빛을 내는 색소폰을 불고 있고, 곡이 진행됨에 따라 여러 장의 팬티가 뜻밖의 장소에서 등장한다. 빛을 내는 색소폰을 부는 여성은 때로는 의도나 대상이 불분명한 언동을 반복하고, 또 때로는 선명하고 뚜렷한 메시지를 주인공을 향해 던진다. 과거의 순간순간을 무작위로 이어붙인 듯한 무질서한 전개에 견디기 힘든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 주인공은 402호실을 뛰쳐나와 엘리베이터 칸 안으로 뛰어들고, 문이 닫히는 데서 작품이 끝난다.

음악 작품의 완성 형태를 영상으로 창작하는 데는 여러 이점이 있다. 먼저 감상자의 ‘시점을 고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색소폰 연주뿐만 아니라 안무와 다양한 연출이 악보에 기보되어 있다. 카메라를 패닝하면서 화면에 비치지 않는 곳에서 다음 연출을 준비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영상으로서의 음악 작품을 유튜브를 비롯한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 업로드함으로써, 감상자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을 체험할 수 있다. 물리적 공간에서의 상연을 최종 목적으로 두지 않는 창작은 나에게 있어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있던 음악 작품 작곡이라는 행위의 ‘마땅한 형태’라는 기존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후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지며 더 새로운 기법으로 이어지게 된다. 2021년 여름 색소포니스트 세라피마 베르콜라트 씨로부터 이 작품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음악제에서 콘서트라는 맥락으로 상연할 수 없겠냐는 문의를 받아, 심사숙고 끝에 작품 콘셉트의 농도를 희석하지 않으면서 라이브 연주에 대응하기로 했다. 여담이지만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 침공이 시작되기 약 반년 전이었다. 지정학에 밝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르지만, 설마 반년 후에 전쟁이 시작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콘서트라는 맥락에서의 초연, 그리고 재연이 가능하도록 우선 모든 것을 재현 가능하게 만드는 매뉴얼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퍼포먼스 노트의 분량이 처음의 약 5배로 늘어났다. 연주자의 의상, 연출에 필요한 침대와 조명의 지정과 설치 방법, 그리고 일렉트로닉스의 트리거가 되는 페달의 배선 방법 등을 기술했다. 또한 색소폰 연주자의 안무와 감상자의 ‘시점’이 이 작품의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넨네코 판츠」를 「넨네코 판츠」라고 부를 수 없어지고 만다. 따라서 공연장에서의 라이브 연주 때는 비디오그래퍼에 의한 라이브 프로젝션을 의무화했다.

영상으로서의 「넨네코 판츠」를 연주회라는 맥락에서 가능한 한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서는 ‘빛을 내는 색소폰을 부는 수수께끼의 여성’ 외의 인물이 무대 위에 서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브 프로젝션을 실시하려면 비디오그래퍼를 무대 위에서 움직이게 해야 한다. 고민 끝에 나는 비디오그래퍼에게 닌자처럼 분장시켜 쿠로코(黒子: 일본의 전통 공연 무대의 검은 옷차림을 한 보조 진행자) 설정으로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쿠로코 설정의 비디오그래퍼가 무대 위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그 화면(세로형)을 실시간으로 무대 배경에 설치된 스크린이나 벽에 투영함으로써 뮤직비디오와 같은 ‘시점’을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악보에는 원래 기보되어 있던 오선보, 안무(자세한 지시는 퍼포먼스 노트에 기재), 그리고 일렉트로닉스 트리거 지시의 세 가지에 더해, 새롭게 라이브 카메라 워크의 지시를 추가했다. 이 라이브 프로젝션 기법을 발견한 것은 이후 창작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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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넨네코 판츠」(2021) 중에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음악을 체험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는 가운데, 나는 연주자와 관객이 무대와 객석에서 마주 보고 앉는 전형적인 연주회장에서의 상연을 전제로 한 음악 작품은 물론, 다양한 종류의 실제 공간이나 가상현실 공간, 혹은 영상으로서의 음악 작품의 디지털 스트리밍 등 다양한 ‘체험 환경’을 상정하며 작곡하고 있다. 음악 작품의 발표 방식을 제로 베이스에서부터 평평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며 표현의 폭이 한층 넓어지는 것으로 이어진다.

감상자로서의 시미즈 차토리: ‘나’와의 거리

나는 ‘시미즈 차토리’가 만드는 작품을 좋아한다. ‘시미즈 차토리’로부터 어떤 음악 작품이 탄생할지 항상 기대하고 있다. 또한 ‘시미즈 차토리’가 만드는 음악 작품을 제삼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작품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 무의식 영역의 조각들을 관찰하며 언어화를 시도하는 것도 흥미롭다.  


인간은 항상 정반대의 존재 상태의 틈새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겉과 속. 바깥과 안. 자아와 비아(非我). 그리고 그 경계는 항상 흔들리며 복잡성을 띤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인간이 만드는 작품이기에 작곡가도 자기 작품의 진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앞서 소개한 「넨네코 판츠」를 제작할 때 나는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자유의 정의는 동서고금 논의되어 온 것이니 이 글에서는 굳이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의문에 다다랐다. 우리는 깨어 있는 상태와 꿈속에 있는 상태 중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울까.  

작품 속에 등장하는 팬티는 우리 모두가 지니는 ‘꽁꽁 숨기고 싶은 무엇인가’의 상징이다.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이 일상적으로 팬티를 입고 있다고 나는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건전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과거의 실패 경험 등으로 형성된 트라우마나,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법한 성벽(性癖) 같은 것을 ‘수치’로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억제하며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긴다. 하지만 그것이 ‘꿈속’이 되면 어떨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트라우마의 파편이나 성벽의 단편이 나타나는 일은 없을까. 꿈속에서는 어느 정도의 통제 능력을 내려놓는 대신, 일종의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촬영과 편집이 끝나 뮤직비디오로 완성된 「넨네코 판츠」를 몇 번이고 다시 보다가, ‘작곡가로서의 시미즈 차토리’가 현실이라 인식하는 세계를 ‘엘리베이터 칸’으로, 그리고 꿈속을 ‘호텔 방’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곡가로서 창작 과정에서는 특별히 깊은 의미를 부여한 연출은 아니었지만, 감상자로서 작품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내가 현실 세계를 좁고 답답한 ‘엘리베이터 칸’으로 느끼고 있으며, 꿈속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R. G. 콜링우드(1889-1943)는 예술가와 감상자 모두 작품으로부터 예술가의 정신 상태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나 자신도 이처럼 예술가인 동시에 내 작품의 감상자이기도 하며, 거기서 많은 발견을 해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 번, 벌레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진짜 벌레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났더니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상태를 경험했다. 독일에서 생활한 지 2년째가 되던 2019년 가을, 도무지 납득이 가는 작곡을 할 수 없게 되어 위촉받았던 작품 하나를 눈물을 머금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비자 갱신과 이사까지 겹쳐서 심신에 피로가 쌓였던 게 원인이었을까. 알람 시계가 계속 울리는 와중에도 그것을 끌 수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 후 조금씩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던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음식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천장만 바라보며 보냈던 기억이 난다.

  

2022년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콘도 세이야 씨로부터 작품 위촉을 부탁받아 벌레가 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헨타이 비틀」(2022)을 작곡하여 12월 도쿄에서 타악기 연주자 아이타 미즈키와 함께 세계초연이 이루어졌다. 콘트라베이스를 벌레(장수풍뎅이)에 빗대어, 독립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여섯 개의 장수풍뎅이 다리를 제작했다. 무대 바닥에 드러누운 연주자 위로 여섯 개의 다리가 꿰매어진 이불을 펴고, 그 위에 콘트라베이스의 뒷판과 다리의 위치가 장수풍뎅이의 다리 위치와 일치하도록 악기를 눕힌다. 여섯 개의 다리는 꺽쇠로 여섯 짝의 검은 슬리퍼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은 마찬가지로 무대 바닥에 누워 있는 쿠로코 역할의 타악기 연주자 양옆에 설치된다. 쿠로코 역할의 타악기 연주자가 악보대로 꼼지락꼼지락 손발을 움직임으로써 장수풍뎅이의 다리가 연동해 움직이는 구조다.

図7. Hentai Beetle (1).jpg

「헨타이 비틀」(2022) 퍼포먼스 노트 중에서

작품은 알람 시계가 요란하게 울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고 있는 벌레의 숨소리가 몇 번 희미하게 들리고, 점차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여섯 개의 다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괴로운 듯한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이 띄엄띄엄 들리고, 진흙처럼 모든 것이 뒤섞인 흐릿한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아주 가끔 쿠로코 역할의 타악기 연주자가 벼락처럼 큰북을 치면 감상자는 퍼뜩 현실로 돌아오지만, 다시 질척질척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깊고 불편한 수렁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관객은 무대 바닥에 드러누운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와 타악기 연주자 주위를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가엾은 벌레가 꼼지락꼼지락 이불 밖으로 나오려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설정으로 작품이 전개된다. 하지만 공연장의 제약 등 여러 이유로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도쿄 오페라시티 리사이틀 홀에서 열린 세계 초연에서는 관객이 무대 위를 돌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넨네코 판츠」와 마찬가지로 라이브 프로젝션을 응용해 우스꽝스럽고도 애처로운 벌레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시계 방향으로 걷는 시점을 라이브 프로젝션을 통해 관객에게 제공했다.

작곡을 하면서 나는 타악기 연주자를 벌레와 독립된 한 명의 연주자로 존재하도록 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공간에 한 명 이상의 연주자, 더 정확히는 벌레 이외의 존재가 눈에 보이는 것에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에, 타악기 연주자를 설정상 쿠로코로 두고 감상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으로 창작을 진행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저 감각적인 판단으로 타악기 연주자에게 바닥에 눕도록 하고, 벌레 다리를 움직이는 시각적 연출과 타악기 연주를 맡겼다. 리허설 때 처음으로 작품을 제삼자 시점에서 볼 수 있었는데, 쿠로코가 된 타악기 연주자가 이렇게 극히 불행한 변신을 겪은 나라는 존재 안에 희미하게 남은 ‘인간’의 일부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릇’으로서의 내가 벌레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인간’으로 남은 나는, 사라져가는 운동 기능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며 어떻게든 손발을 써서 일어나려 발버둥 치고, 불규칙하게 흐르는 전기 충격처럼 갑자기 생겨나는 초조함이라는 정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든 두 작품의 예처럼, 나는 ‘나 자신의 음악 작품을 제삼자 시점에서 체험하는 것’을 창작 과정에 포함시키고 있다. 비유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하는데, ‘시미즈 차토리’는 각자 역할을 맡은 세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현실을 살아가는 시미즈 차토리’. 환경에 따라 꿈과 현실을 오가거나, 딱정벌레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까지나 충실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중립적으로 묘사하는 ‘작곡가로서의 시미즈 차토리’. 마지막으로 그 묘사에서 스며 나오는 함의를 독립된 시점에서 해석하는 ‘감상자로서의 시미즈 차토리’가 존재한다. 이 세 인격을 잘 기능시킴으로써 창작이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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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과정에 필요한 시미즈 차토리의 ‘세 인격’의 예

작품을 관찰하고 귀를 기울이며, 표현자의 무의식에 깃든 함의를 풀어내는 제3의 시점(그것이 타인이든, 혹은 작품과 거리를 둔 자기 자신이든)이 예술을 예술답게 만든다.

예술가의 초기 충동은 계획된 표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도 스며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표현자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소재의 제시만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의 ‘무의식의 목소리’를 ‘감상자로서의 시미즈 차토리’가 인식함으로써 창작이 완료되는 것이다.

다 같이 ‘시미즈 차토리’를 즐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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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에게는 강렬한 자아(ego)가 필요해”라고 내가 존경하는,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가 늘 말하곤 했다. 물론 나에게도 남들 이상의 자기현시욕이 있을 테고, 작품을 더 많은 사람이 알고 체험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크다. 그러나 이렇게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정말로 확고한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불안해진다. 나는 13살 때부터 거의 매일 밤 일기를 쓰고 있는데, 음악 작품도 그런 감각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거대한 모기에게 물리면 「big mosquito」(2017)가 탄생하고, 사랑니를 뽑으면 「매직 만쥬」(2023)가 태어난다.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이미 벌레가 된 경험도 있고, 훗날 갑자기 콘크리트 벽이 되어버린다 해도 더는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앞으로 어느 나라에 가서, 그 나라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와 깊이 교류하며, 어떤 새로운 개념이나 감각에 물들어 갈지, 그리고 어떤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 태어날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시미즈 차토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지금’을 살아감으로써,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시미즈 차토리’가 그 체험을 충실하게, 그리고 다양한 사고적 제약을 뿌리치며 타협 없이 묘사함으로써 새로운 음악 작품이 탄생한다. 그 음악 작품을 ‘감상자’로서 체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번역 오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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